2009년에 한 학기동안 함께 방을 썼던 언니가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11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전을 보고싶다며 오랜만에 연락했다. 나는 어린 시절을 디즈니와 함께 보낸 탓인지 지브리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지만, 지브리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가 궁금했던지라 흔쾌히 같이 가자고 했다.1

전시에 대한 느낌을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큰 기대 안했는데 다시 가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괜찮은 전시였다는 것.

레이아웃이란

나는 애초에 레이아웃이 뭔지 모르는 상태로 전시를 보러갔기 때문에 전시 제목에서도 “레이아웃”보다는 “지브리”가 돋보였는데, 사실 이 전시는 지브리만큼이나 레이아웃이라는 장치 그 자체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 많다. 이번 전시를 개최한 현대카드 Super Series의 블로그에는 레이아웃이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진다고 쓰여있다.

애니메이션 제작의 공정은 크게 기획 → 각본 → 그림콘티 → 레이아웃 → CG/작화/배경 →촬영구성 → 편집 → 음향의 단계로 나눠지는데요. 레이아웃은 그림콘티에서 정해진 큰 구도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화면을 설계하는 작업입니다. 그림콘티가 영화 전체의 설계도라면, 레이아웃은 각각의 장면에 대한 세부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웹 서비스 개발의 관점에서는 그림콘티가 기획안이라면, 레이아웃은 페이지 설계인 것이다.

서비스 개발의 관점에서 본 애니메이션 레이아웃

나는 지난 1년간 팀포퐁에서 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정치에 대한 정보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한 서비스 포커(Pokr)를 기획하고 개발하였다. 포커를 베타 런치한지 이제 20여 일밖에 되어서인지, 이번 전시는 서비스 기획의 입장에서 많이 바라보게 된 것 같다.

1. 소통을 위한 시스템

팀웍을 하다보니 “효과적인 소통”에 대해 고민할 기회들이 우리에게도 자연스레 주어졌는데, 레이아웃에도 딱 그러한 역할을 하는 장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2

용어 통일. 지브리 레이아웃들에는 “Book”이라든지 “C-100”과 같은 “그들만의 용어”가 자주 등장하였다. 웹서비스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개발자, 디자이너 등 애초에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코웍하기 위해서 서비스의 기능이나 구성요소에 대한 용어 통일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특히 시스템의 front end와 back end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달라지지 않도록, 정치용어집을 만들기도 했다.3

적절한 도구의 선택. 레이아웃을 그리는 때는 용지, 연필, 샤프, 색연필이 주된 도구지만 펜, 자, 먹지4, 컴퓨터5 등의 도구가 다양하게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그들은, 필요할 때는 전지 3장쯤 연결해 붙인 크기의 커다란 종이를 사용하거나, 육각 모양의 종이를 사용하며 기존의 틀을 깨며 다양한 방식의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어떤 도구를 어디에 활용해야하는 줄 아는 것 같았달까? 팀포퐁의 경우에도, 소통을 위해 메신저, 게시판, 메일링 리스트 등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도구들의 특성을 보다 잘 파악해서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확(clear)하고 간결(brief)한 소통법. 지브리의 레이아웃들은 색과 선, 그리고 간결한 글자 몇 개로 소통하고 있었다. 가령, 그림자는 파란색 색연필로 그린다든지 카메라의 움직임은 화살표와 프레임 숫자로 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팀포퐁은 지브리만큼 대규모의 팀은 아니지만, 온라인, 파트타임으로 일한다는 특성 때문에 이와 같은 명확하고 간결한 소통의 중요성이 종종 부각되었다. 요즘 우리팀은 메신저를 이용한 회의가 끝나자마자 누군가 (시키지 않아도!) 당일의 아젠다를 내부 게시판에 정리하고, 태스크를 Trello 보드에 카드로 추가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회의의 결과에 대한 오해도 쌓이지 않고 일의 분배 또한 명확하게 되고 있다.

2. Simplicity와 complexity의 공존

지브리의 레이아웃은 그림 자체에서도 배경은 복잡하고 피사체는 단순하게, 때로는 배경을 단순하고 피사체를 복잡하게 그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게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대상을 부각시키는 것을 보며, 어쩌면 이들은 우리와 비슷한 고민들을 안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팀포퐁도, 어떻게 하면 중요한 정보를 과하지 않게 부각시킬 수 있을지를 자주 고민하기 때문이다. 복잡한 구조와 내용을, 직관적이고 깔끔한 인터페이스로 보이게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6

뿐만 아니라, 지브리의 레이아웃은 배경과 피사체가 여러 개의 레이어로 분리되고 합체(조립)되는 등, 관객에게는 평면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장면에서도 복잡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그림들이 대부분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전반적인 그림이 머릿속에 다 들어있고, 손은 그것을 단순히 projection 시키고 있는걸까? 나는 머릿속의 디테일이 현실화되었을 때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을 종종 느끼는데, 과연 지브리팀도 그러한지 궁금했다.7

3. 또 다른 관점에서 든 생각들

데이터 다루는 방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레이아웃 한 장 한 장의 디테일에 감동했다.8 마치 한 땀 한 땀 크롤링을 한다거나 데이터 전처리, 또는 탐색(exploration)하는 과정이 떠올랐달까? 그렇게 세세한 디테일을 살리고 있을 때, 작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작업할지 궁금했다.

스케치에 한 번쯤 관심을 가져본 사람으로서는 선의 강약과 굵기를 다루는 테크닉에 감탄했고 무엇보다 선을 한 번에 깔끔하게 그린다는 점이 너무 부러웠다. 그림자를 파란선으로 그렸을 때 풍겨지는 인상주의적 느낌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드래프트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이 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시간내서 볼만한 지브리 레이아웃 전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만화 판넬에 다음과 같은 글이 (아주 작게) 쓰여있다.

애니메이션은 직접 그린 그림 기반의 표현이기에 실사영화에서 흔히들 말하는 ‘우연’은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인정신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대한 자부심이 동시에 드러나는, 아주 인상적인 말이었다. 나는 그동안 애니메이션을 볼 때 스토리나 그림체 정도만 봤지 그 제작 과정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는데, 위의 말을 통해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진 것 같다.9

전시 설계 자체에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레이아웃 옆에 애니메이션 자체를 함께 전시한다는 점이 무척 좋았다. 좀 더 많은 레이아웃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보여준다든지, 작품 간 경계를 좀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든지, 방의 테마들을 좀 더 살리면 좋았을 것 같기도 하지만, 여튼 생각을 정리하고 좋은 영감들을 얻을 수 있었던 멋진 전시였다.

마지막으로 전시 관람에 대해 떠오르는 팁들을 랜덤하게 나열해보겠다.

  • 전시장은 팬들로 가득했고, 실제로 일본인도 많았다.
  • 표를 10시 50분쯤 구매했는데 대기번호 128번(!)이었다. 딱 11시쯤 입장했으니까 오래 기다리지는 않았는데, 처음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편하게 관람하기 어려웠다.
  • 그래서 우리는 1번 전시실을 다 보고 나서는 4-5-6-2-3번 순으로 전시실을 돌았다. 전시실은 총 6개.
  • 친구는 전체를 보는데 3시간 정도 걸렸다고 했고, 친구의 친구는 1시간 정도 걸렸다고 했는데, 우리는 2시간 정도 걸렸다.

그나저나, 다음에는 “반딧불의 묘”를 꼭 봐야겠다는 생각.

TL;DR
압도당하고 왔다.

  1. 정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스튜디오 지브리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이 불과 몇 달 전이다. 

  2. JIT도 일본에서 처음 주창되었는데, 어쩌면 “프로세스”, “최적화”와 같은 것들이 민족 자체의 정신에 녹아 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3. 아직 정치용어집은 이렇게 내부에서만 사용되고 있지만, 곧 포커의 용어 설명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고 차후 독자적인 서비스로 발전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4. 자세히 보면 레이아웃의 선들을 따라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5. 레이아웃을 그릴 때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것이 아주 놀라웠다! 어떤 작품인지 적어두지 않은 것이 너무 아쉬운데, 복잡한 대칭 구조를 그래픽으로 generation한 경우가 있었다. 픽셀들이 보여서 알 수 있었음. 

  6. Donald A. Norman의 심플은 정답이 아니다 참조. 

  7. 우리 팀은 그래서, “일단 해보자”는 말을 좋아한다. 프로토타이핑을 하고 나면, 말로 토의만 할 때보다 결정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8. 사실 이건 대부분의 미술작품들을 볼 때 드는 생각이지만. 

  9. 환상적인 빛과 조명을 사용하는 초속 5센치미터만큼은 예외였지만.